Page 59 - 월간붓다 2020년 1월호 (Vol 3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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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의 중흥조
한양을 수복하고 나서 선조가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때 휴정은 승병 수
백 인을 이끌고 호위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선조에게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 59
월간붓다
다.”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선조가 그 뜻을 가상
하게 여겨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
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1 월호
이상의 사실이 휴정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조선의 하늘
과 땅에서 불교와 스님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당시 불
교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기여했다고 해서 조정과 신료들이 스님들에
게 예전과 다른 좋은 대우를 해준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인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것이 휴정이 조선불교에 끼친 첫 번째 공적이라 할만하다.
휴정은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고을 수령이 그를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成均館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
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
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
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급수귀래홀회수 靑山無數白雲中청산무수백운중)’라고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출가하고 경성 일선(敬聖一禪,
1488~1568)에게서 수계受戒하였으니, 이때가 1540년(중종 35), 나이 21세
되던 해였다. 그 후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2)을 참예參詣하여 인가印
可를 받았다. 그리고 7, 8년 동안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고 30세에 선
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
에 이르렀다.
장유張維가 찬술한 비문에 의하면 휴정은 “영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
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