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월간붓다 2021년 8월호 (Vol 402호)
P. 49

상소문으로 불교 억압을 비판하다





               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유가 문인과의 교유는 스님의 글과 유가적 식견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견줄 정도로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스승 벽암 각

               성 스님이 선조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을 비롯한 유불儒佛 인사들과 교유한

               전통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스님은 이와 같은 상호 소통 분위기의 흐름에

               부합하여 불교 억압을 반대하는 상소도 가능했을 것이다.


                  스님은 20세(1636년, 인조 14) 무렵 지리산 쌍계사에 머무르고 있던 벽암

               각성 스님을 찾아가 수선修禪과 내전內典을 익혀 상수 제자로 20여 년간 함

               께 하였다고 한다. 스승 벽암 스님은 부휴 선수 선사에게 사사한 후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 지역을 유력하며 수행하였고, 임진왜란이 발발

               하자 해전海戰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부휴 스님에

               게 강석講席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벽암 스님은 1612년(광해군 4) 2월에 일


               어난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스승 부휴 스님, 의승수군 승대장義僧水軍僧

               大將 자운 삼혜慈雲三惠 스님과 더불어 무고를 당하였지만, 그것을 계기로 광


               해군에게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벽암 스님은 1624년(인조 2)부터 1627년(인
               조 5)까지 8도 도총섭으로 남한산성을 축성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은천교


               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는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 3천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돌아


               왔다. 1640년(인조 18) 8월에 규정도총섭으로 적상산성을 수축하고, 사고史

               庫를 수직하기도 하였다.

                  백곡 스님은 30세인 1646년 무렵에는 문장으로 스승뿐만 아니라 인조仁


               祖에게까지 인정을 받았다. 당대의 문인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 1634-1684)

               도 ‘대사의 문장은 자못 광대무변하였는데, 마치 계곡의 물이 쏟아져 나오

               는 듯하였고 강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고 하였으며, 자수 무경(子

               秀無竟, 1664-1737) 스님도 ‘우리나라의 시승詩僧은 고금에 수가 많지만, 문


               장과 도덕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분은 오직 백곡




 48                                                                                                          49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