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월간붓다 2019년 10월호 (Vol 3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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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찾아서 / 부용 영관(芙蓉 靈觀, 1485~1571)
제자 청허가 스승 부용의 진영眞影에 읊은 찬탄이다. 나 목숨을 부여받은 것은 똑같고 고통을 참는 것도 마찬
부용의 성품과 생애를 가늠할 수 있는 흔적이다. 우선 가지입니다.”라고 한 것이나 돌을 세워 부처님이라고 하
스승을 따라 공부하여 그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이 기도 하고, 모래를 올려 공양이라 하기도 하며 눈을 감
후에는 몰려오는 수많은 제자들을 제접하여 인천人天의 고 꿇어앉아서 해가 지는 줄 모른 것을 보면 불법佛法과
스승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은 지중한 인연이 있었다. 부용이 어릴 때 지나가던 스님이
고요함(寂)과 텅 빈 하늘(空)만 남을 뿐이었다. 수행자와 “이 아이는 출세간의 보배요 세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스승의 역할을 했을 뿐 그는 다시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부디 출가시키기 바랍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부용은 법명이 영관靈觀이고, 호는 은암선자隱庵禪子 부용은 나이 13세 되던 해(1497)에 집을 나와 덕유산
혹은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고 한다. 1485년(성종 16) 삼 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행하는 스님을 만나 가르침
천포에서 태어났다. 집안 살림이 넉넉했지만, 대대로 을 받은 지 3년 만에 머리를 깎았다. 이후 부용은 여러
미천하여 예절이 바르지는 못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 해를 선지식을 찾았고, 9년 동안 구천동九泉洞으로 들어
다. 때문에 당연히 삶이 거칠었을 것이고, 출세의 욕심 가 홀로 정진하기도 했다. 그동안 신총信總법사에게 교
또한 누구보다 많았을 것이지만, 부용의 삶을 보면 예 학의 강령을 탐구하였고, 위봉威鳳대사에게 선禪의 요체
상 밖이다. 를 배웠다. 1509년(중종 4) 용문산에서 조우祖愚대사와는
기록은 그를 “몸은 비록 이 세간에 머물렀지만, 생각 선에 대해 토론하고 그 여가에 『노자』와 『장자』까지 섭렵
은 늘 서방西方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거주하는 방을 부 하여 그 수행의 깊이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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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을 용당芙蓉堂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나이 여덟 살 때
아버지와 물고기를 잡으러 가서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 공연히 소림少林을 생각하다가 시간만 낭비하니
고는 아버지가 화를 내며 매질을 하자 “사람이나 물고기 우물쭈물 하다가 귀밑털만 하얗게 세었네.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