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월간붓다 2019년 10월호 (Vol 380호)
P. 55

불교중흥의 초석을 마련하다②





                  옛날 비야리毘耶離의 소리와 냄새도 없고                                                 『노자』·『장자』와 각종 유가경전은 부용이 저 언덕으로

                  마갈타摩竭陀의 메아리 소리도 없다.                                                   가는 뗏목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던 것이다.

                  말뚝으로 능히 분별하는 뜻을 막고                                                       부용의 시절에는 불교계가 선禪만이 최고라든가, 교敎

                  어리석음으로 반드시 시비하는 마음을                                                   만이 최고라고 하여 갈등과 대립을 키워가고 있던 시절
                                                                                                                                                                   55
                  막는 것과 같다.                                                             이었다. 흔히들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잘못 이해하여 부처
                                                                                                                                                                    월간붓다
                  짐짓 망령된 헤아림으로 산 밖을 나니                                                  님의 말씀인 교학은 선 수행을 위해서 마땅히 버려야 할

                  온종일 속세를 잊고 푸른 산을 마주한다.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과 교가 어찌 둘이겠
                                                                                                                                                                       10
                                                                                        는가. 설령 선을 우위에 두는 경우가 지배적이라고 할지                                              월호

               부용이 1519년(중종 14) 금강산 대존암大尊庵에 이르러                                         라도 깨침의 완성은 선과 교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읊은 율시다. 오랜 세월 내 주머니에 보배가 있음을 알                                              아니다. 오늘날에도 교학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가 있다.

            지 못하고 산천을 헤매고 스승을 찾아 떠돈 것이 원망스                                              경계할 일이다.

            러웠던 것이다. 봄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집에 돌아와 보                                                 1519년(중종 14) 부용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뵙

            니 봄은 이미 내 집에 있었고, 붉게 핀 매화가 코를 찌르                                            고 지리산으로 향하였다. 훗날 그가 법을 이어 받은 벽

            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부용은 붓과 벼루를 불사르                                              송 지엄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벽송은 1520년(중종 15)

            고 입을 닫은 채 묵묵하게 앉아서 9년 동안 정진했을 뿐                                             지리산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고 정진했다. 오늘날 함양

            간혹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이 시를 가리키기만 했다고                                               벽송사碧松寺다. 벽송은 이때부터 성품과 도량은 더욱 넓

            한다. 그동안 장부일대사를 터득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어지고 풍채와 지혜는 더욱 밝아졌다고 한다. 입산入山

            배웠던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모두 던져버린 것이다. 그                                              이후 벽송은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외부와 교류하지 않

            러나 그간의 노력이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경전과                                               았다고 한다. 세상에 아첨하지 않고, 불법佛法을 세상에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