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월간붓다 2021년 7월호 (Vol 4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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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서다





               명四溟, 송월松月과 비교해 보면 앞과 뒤가 똑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


               다. 그는 스님의 문집인 『허백집虛白集』에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스님은 7, 8세에 이미 출가出家할 뜻이 있어 13세에 보영普英스님을 좇아

               묘향산으로 가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모시고 팔백 명의 스님과 더불어 무리

               를 지어 지내니 마음이 매우 기뻐서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다. 사명당이


               왕명을 받아 일본으로 떠났을 때는 사명당의 제자인 인영印暎스님을 따르

               면서 선禪을 닦고 부처님의 말씀(경전)을 공부하였다. 그 뒤 원준圓俊스님에

               게서 화엄대교華嚴大敎를 배웠고 송월 응상松月應祥에게서 선법을 전해 받았


               으며, 얼마 후 지리산에 들어가서 무염無染스님에게 의심스러운 것을 묻고

               수행하다가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

                  1626년(인조 4) 후금後金이 국경을 위협하자 조정에서는 스님을 팔도의승


               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관서지방에서 의승병 4,000명을 모집하여 평

               양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훈련시킨 뒤 안주安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듬해

               에 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웠다. 그 뒤 묘향산에 머무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안찰사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의승


               병 대장이 되어 관서지방 관민을 동원하고 곡식을 수집하여 군량미를 충당

               하였다. 1637년 정월에 인조가 항복하여 청나라 군사가 물러간 뒤 조정에

               서는 스님의 공을 높이 사서 ‘가선대부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복국우세 비


               지쌍운 의승도대장 등계嘉善大夫 國一都大禪師 扶宗樹敎 福國祐世 悲智雙運 義僧都

               大將 登階’의 직호와 직첩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

               에 통분하여 직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나라가 안정되자 경치 좋은 곳에서 깨달음을 위해 금강산·지

               리산 등을 순례하고 심지어는 큰 바닷가와 아름다운 절 등 명승지를 두

               루 편력하였다. 한 유생이 이런 스님을 조롱했을 때는 다음과 시를 읊


               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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