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월간붓다 2018년 11월호 (Vol 3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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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란 무엇인가?



               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보리심석』의 32번째 게송의 경우에는 정확히 해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승장엄경론』에 의하
               면 어떤 조건과 만났을 때 인식과 그에 대한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진
               실이 아니면서 진실인듯 하게 하여 윤회의 동력이 됩니다.                                                       27
                 의식에 의해서 의식 대상을 알 수 있으므로 인식 대상 없는 의식은 없습니다. 중관의 입장에서                                  붓 월 간 다
               마음이 진실로 성립되고 자성이 있다면 자체에서 의지하지 않고 성립돼야 합니다. 인식하는 대
               상과 주체는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불변의 자성은 없                                            11 월 호
               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이름과 달리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언어 또한 관념일 뿐이지 변치 않는 자성은 없습니다.
                 마음은 환과 같은 본성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은 경계가 되는 근과 경에 의해 일어납니다. 일
               반적으로 생각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라는 말에 따라서 실체인양 느껴지지만 실상은 이것이라고
               규명하려 할 때 결코 실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롯한 모든 제법은 의존에 의해 존재하
               니 본래 자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희론이 적멸한 무분별의 지혜가 생기기 이전에는 대상

               이 마치 진실인양 여겨집니다. 어떤 이에게 분멸이 일어난다면 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승
               의보리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지해서 공을 이름붙인 것뿐이지 공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보
               리라는 말은 희론의 적멸을 의미합니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허물이 벗겨져
               본래가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는 의식 또한 적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란 성품이 없고 생함이 없으며 존재한 적이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공성을 깨달은 승의의
               보리심은 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 깨달음의 정수에 머무시는 부처님은 언제나 공이 허공과 닮
               았음을 아십니다. 붓다라는 말 속에도 ‘청정하다’ ‘그치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선 보리
               와 같은 맥락으로 집착의 근거가 모두 적멸한 상태입니다.
                 희론의 적멸이 바로 공성입니다. 이런 공성을 깨달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대치합니
               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는 궁극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선과 불선의 분별의 흐름을 깬 것
               이 공입니다. 마음에 의식의 대상이 없는 머무름은 허공의 성품입니다. 인무아에 대한 무아 역시 외
               부의 대상에 대한 집착들을 완전히 없애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관의 자립논증에서는 자상을 인
               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상을 귀류논증에서는 언어에서 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 배재되어야 합니다. 공의 사자후에 모든 실유론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실체가 있는 타력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부 조건에 의해 결과
               물이 발생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이후 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체 종
               지를 이루고 이를 위해 승의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자성은 제법의 법성입니다. 사탕
               의 달콤함과 불의 본성인 뜨거움과 같이 모든 법의 본성을 공으로 인정합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보림화)
                                                                        omflower@gmail.com
                                                                        가교. www.gagy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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